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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부치들을 찬양함, <부치, 젠더질서의 교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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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부치.jpg

영화 <부치, 젠더질서의 교란자>는 부치 당사자가 부치를 소재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려고 시도하는 길지 않은 다큐멘터리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90년대의 흑인 레즈비언 부치들을 다룬 영화인 <부치 미스티끄 Butch mystique>(1)을 연상시킨다. 

두 영화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예컨대 <부치, 젠더질서의 교란자>가 인종과 세대, 계급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이는 반면, <부치 미스티끄>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물들을 통해 흑인 레즈비언 부치들 사이의 불일치를 드러낸다. <부치, 젠더질서의 교란자>가 충분히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라고 승인된 주제를 다루려는 반면, <부치 미스티끄>는 '펨'과 '삽입'에 대해 이야기한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두 영화 중 뭐가 더 낫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두 영화 모두 '내면의 부치 혐오'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레즈비언 역사에 관심있는 모두에게 추천할 만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간 레즈비언이 나온다는 이유로 평균적으로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영화관에 앉아서 고통을 받아온 많은 이들에게 <부치, 젠더질서의 교란자>는 현명한 선택이 될 것이다. 러닝타임이 56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부치, 젠더질서의 교란자>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부치, 젠더질서의 교란자>ⓒ 여성인권영화제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흥미로운 순간들을 끝도 없이 제공한다. 내 생각에 이 영화가 가진 논쟁적인 측면들은 등장인물 대부분이 '불대거 Bull dagger' 공동체의 일원이자 젠더/레즈비언 연구의 전문가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잘 교육받은 이론가이자 활동가로서 이들은 자신의 젠더 표현이 왜, 어떻게 '트러블'이 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부치 미스티끄>에 나온 표현을 빌리자면, 이들은 젠더 규범을 무단횡단하는 '젠더 테러리스트'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가 (불가피하게) 세상에 테러를 하고 있는 것과 달리, 영화는 그다지 급진적인 관점을 보여주지 않는다. 어쩌면 할버스탐 jack halberstam의 말대로, 동성결혼이 (미국에서) 법제화되고 트랜스젠더가 전례없이 가시화된 이 시점에서, '부치'란 그저 '오래된 패러다임의 파편'에 불과한 것 아닐까?(2)

이러한 의심은 <부치, 젠더질서의 교란자>의 등장인물들이 트랜스젠더를 언급하는 와중에 더욱 심화된다. '배운'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로서 이들은 트랜스젠더리즘과 레즈비언 부치인 자신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발언들을 주저하지 않는다. 요컨대 남자로 오해받는 것이 기분 나쁘다거나, 자신은 트랜스젠더가 될 생각이 없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뭐 본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그걸 굳이 트랜스포비아적이라거나 본질주의적이라고 비판할 필요는 없다(게다가 본질주의적이라는 지적은 비난이 아니다).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부치, 젠더질서의 교란자>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부치, 젠더질서의 교란자>ⓒ 여성인권영화제


다만 비교적 젊고 비교적 레즈비언 페미니스트가 아닌 나로서는, 트랜스젠더리즘과 페미니즘 사이의 긴장과 중첩을 애써 무시한 채 부치 정체성을 논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기이하고 조금은 당혹스럽다. 어쨌든 제목이 젠더 트러블 gender trouble, '젠더질서의 교란자'가 아닌가? 게다가 이들이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으로서 여성을 사랑한다고 해도, '티나는' 부치로서 겪는 곤혹을 묘사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예시는 언제나 화장실 혹은 병원이다. 

연륜있는 불대거인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은 화장실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여성들이 화장실에서 안전해야 한다는 것은 공감해요. 하지만 나를 진짜로 남자로 착각하는 것과, 여자인 것을 알아봤으면서도 남자같이 생겼다고 단죄하려는 것은 다르죠.' 

규범적이지 않은 몸에 대한 규범적인 판단은 병원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병원에 갔는데 보자마자 날 진단 내리는 겁니다. 남성 호르몬이 너무 많다고요.' 여성으로서 젠더 일탈적인 몸에 대한 여성들의 즉각적인 거부와 공포를 묘사할 때마다 다큐멘터리는 원치않게 < Gender trouble:the butches >가 아니라 < Gender trouble:the transgenders >가 되는 것 처럼 보인다.

앞서 소개한 <부치 미스티끄>에서는 화장실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부치 전용 화장실'을 제안하기도 한다. 글쎄, 영화에 삽입된 곡의 가사처럼, 대체 어떡하면 좋을까? 인터뷰에서 한 인물이 제안하듯 '평생 부치 공동체'를 통해 레즈비언 부치의 생애 모델을 제공하고 부치들 사이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젠더 규범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마치 모티크 위티그 monique wittig가 성차별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조건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안으로 레즈비어니즘을 적극적으로 제안했던 것처럼 말이다.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부치, 젠더질서의 교란자>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부치, 젠더질서의 교란자>ⓒ 여성인권영화제


기대한 것만큼 이 부치들이 충분히 '퀴어'하지 않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전혀 없다. '부치라는 이유로 모든 비난을 흡수하는 느낌'이라고 고백하는 부치를 구경하는 경험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이 부치는 자신이 부치 전형성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감히 주장한다. 체크남방을 입고 말이다...). 게다가 부치를 고대 유물 취급하는 것에는 어딘가 미심쩍은 신속함이 있다. 안드로진과 톰보이, 스터드 Stud의 반짝거리고 매끈한 이미지가 새로운 세대의 이상으로 부상되고 있는 와중에 레즈비언 부치의 남성성은 지나치게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재현되지 못한다. 여전히 레즈비언 재현은 상품화되기 적절한 수준까지만 관용된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인 부치를 문화적 기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로 취급하는 것은 어쩐지 정의롭지 못하다고 여겨진다. 무엇보다 내가 걱정해주지 않아도 이 부치들은 살아남을 것이다. 재정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구체제적인' 레즈비언 바들이 거의 멸종한 2017년에도 여전히 레즈비언 부치는 살아남았다. 영문도 모른 채 '티부 죄송'을 당하고, '남성 모방'이라는 혐의를 내재화하면서도 끝까지 '티부'는 '티부'다. 기쁘게도 말이다.